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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정원에는 보물 제357호 정도사 터 오층석탑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석탑부재와 건축부재를 전시하여 우리나라 석조물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박물관 뒤편 산책로에는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집터, 삼국시대 토기가마 등의 유구를 옮겨 놓아 산책을 하면서 우리 역사의 흔적을 느껴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석탑은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정도사淨兜寺 터에 있던 것인데, 1924년 경복궁으로 이전했다가 1994년에 이곳으로 옮겨 왔습니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이은 고려 초의 석탑으로, 원래 5층이었으나 현재는 5층 지붕돌은 남아 있지 않고, 5층 몸돌 위에 노반露盤만 올려져 있습니다. 아래층 기단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세 구씩 조각하고 안상무늬의 아랫부분에 귀꽃을 표현하여 장식미를 더했습니다. 위층 기단 한 면에는 이 탑이 고려 현종 22년인 태평太平11년(1031)에 국가의 안녕을 빌기 위하여 건립하였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명문을 보존하기 위해 2001년 새로운 면석으로 교체하여 조립하였으며, 원래의 면석은 별도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1층 몸돌 정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탑 안에서는 형지기形止記와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는데 형지기에는 이 탑의 이름과, 1019년부터 1031년에 걸쳐서 상주계尙州界 경산부京山府에 속하였던 약목군若木郡의 향리와 백성들이 발원하여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소수서원은 원래 숙수사宿水寺 터로, 1953년에 많은 금동불상이 출토되었으며 지금도 당간지주(보물 제59호)와 불상대좌, 광배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 돌기둥은 누각樓閣 형태의 전각에 사용했던 석재로 추정됩니다. 자연석을 이용해 아랫면과 윗면만 다듬었을 뿐 자연과의 조화를 꾀하여 원래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멋스럽습니다.
대구시 동구 백안동 175번지에서 발견된 신라시대의 화강암제 석탑입니다. 탑신 1매와 옥개석 2매만 남아있고 상륜부와 기단부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모서리 부분이 파손되었으며, 탑신부는 정육면체로 가장자리에는 우주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옥개석은 처마모양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하위는 계단형태로 표현되었습니다.
이 가마는 산의 경사면을 따라 설치된 반 지하식 굴가마(등요 登窯)이다. 전체 크기는 길이 560㎝, 너비 170㎝, 깊이 70㎝ 내외이며, 바닥경사는 13° 정도이다. 토기를 구울 때 불을 지피는 연소실燃燒室과 토기를 굽는 공간인 소성실燒成室은 벽체壁體와 천정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그러나 아궁이와 연기가 빠지는 연도煙道는 남아있지 않아 원래 형태를 알기는 어렵다. 가마 내부에서는 삼국시대 토기 조각과 토제품 등이 출토되어 시기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굴가마로 토기를 굽기 시작한 것은 기원 전후로 알려져 있다. 다만 실물 자료로 조사된 사례는 많지 않은데, 대표적인 예로는 충북 진천군 삼룡리三龍里 백제 토기가마(원삼국시대)와 경주 손곡동蓀谷洞 토기가마(삼국시대)가 있다. 옥산동 7호 토기가마는 가마의 구조가 양호한 편이다. 또한 사용 시기를 추정할 수 있어서 삼국시대 토기 제작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설화리고분군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설화리 556-5번지의 구릉에 위치한다. 영남문화재연구원이 2012년 3월 19일부터 9월 4일까지 발굴했으며, 청동기시대 돌널무덤石棺墓 1기와 삼국시대 덧널무덤木槨墓 1기, 돌덧널무덤石槨墓 15기, 독무덤甕棺墓 1기, 돌방무덤石室墓 16기가 조사되었다. 원형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어 이곳으로 이전한 1호 돌방무덤은 널방玄室‧널길羨道‧호석護石‧봉분封墳을 갖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이다. 널방은 깬돌로 벽을 쌓고 큰 판석으로 천장을 덮었다. 서쪽으로는 출입구인 널길을 두었다. 관이 놓이는 널방에서는 귀걸이金銅製耳飾‧쇠도끼鐵斧‧미늘쇠有刺利器‧쇠칼刀子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무덤을 덮은 봉토에서는 제사와 같은 의례와 관련 있어 보이는 뚜껑 있는 굽다리 접시有蓋高杯도 여러 개 확인되었다.
대구광역시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신천 주변에는 신석기시대 이후의 유적지가 곳곳에 남아있다. 상동유적은 신천이 대구분지로 흘러드는 지점의 동쪽 자연제방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청동기시대의 집터와 고인돌이 많이 남아있다. 이 집터는 대구한의대학교 한방지원센터 부지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움집터竪穴住居址인데, 강돌로 벽을 쌓은 독특한 형태를 보존하고자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집터의 크기는 420~440㎝로 평면이 거의 원형이다. 남아있는 벽체의 높이는 44~90㎝이다. 이와 같은 집터는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다롄시大連市 쑤앙투어즈유적雙砣子遺蹟과 양토우와유적羊頭窪遺蹟, 제주도 서귀포시 화순리유적에서 확인된다. 상동 청동기시대 집터는 한반도 주거문화뿐만 아니라 중국 동북지역과의 문화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칠곡군 복성리 고인돌은 경부고속철도 건설공사 구간 내에 포함되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20여기의 고인돌과 돌널무덤이 확인되었는데 그 중 9호, 12호 돌널무덤과 2호 무덤의 뚜껑돌을 이곳에 옮겨 놓았습니다. 이 돌널무덤 가운데 12호는 주변에 긴 네모골로 넓게 돌을 깔아 무덤의 범위를 표시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 무덤 속에는 대롱옥으로 만든 목걸이와 돌화살촉, 붉은간토기 등의 유물이 남아 있었습니다. 9호는 바닥에 자갈을 깐 뒤 죽은 사람을 묻었던 무덤으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고인돌은 선사시대 사회구조와 정치체계는 물론 당시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연구자료입니다.
이 무덤들은 청동기시대 고인돌 아래 땅속에 만든 돌널石棺입니다. 땅위에 있던 큰돌上石은 이미 없어지고 주검을 묻었던 돌널만 남아 있습니다. 2010년 11월에 대구도시철도 3호선 건설구간에서 발굴되어 이곳에 옮겨졌습니다. ‘1호 돌널’은 1938년에 이미 발굴된 대봉동 제1구 제1호 고인돌입니다. 도시철도 공사구간에 옛 발굴지점이 포함되었기에 다시 발굴하였는데, 가까이에서 2기의 돌널이 새로 확인되었습니다. 1938년에는 채소밭이었으나, 이후 주택지로 바뀌면서 돌널들이 약간 손상을 입었습니다. 이천동 고인돌은 신천 주변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강둑에 위치하는데, 청동기시대 생활모습과 대구의 선사시대 지형을 가늠해 볼 수 있게 하기에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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