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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의 옥외정원에는 정도사지 오층석탑(보물)을 비롯하여 문인석, 태실 석함, 대구읍성 성벽돌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던 석조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박물관 뒤편 산책로를 따라가면 대구지역 인근에서 발굴된 돌방무덤, 고인돌, 토기가마 등의 유구를 옮겨 놓아 우리 역사의 흔적을 느껴볼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정도사지 오층석탑은 고려 현종 22년(1031)에 세운 탑이다.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의 정도사 터에 있었는데, 1905년 경부선 철도를 놓을 때 해체되어 1924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이후 1994년에 국립대구박물관이 문을 열면서 현재 위치에 다시 옮겨 세웠다.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양식이 남아 있는 고려 초기의 석탑이다. 탑은 5층이었지만 맨 위층 지붕돌이 사라져 탑 꼭대기 부분(상륜부相輪部)의 부재인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아래층 바닥돌에는 각 면마다 연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무늬(안상眼象)를 3개씩 조각하였고, 그 안에 귀꽃 무늬를 새겼다. 위층 바닥돌에는 탑을 세운 시기와 목적 등을 새겨놓았다. 1층 몸돌에는 앞면에 자물쇠가 달린 문을 표현하였는데, 안쪽에 사리를 담는 공간이 있다. 이 공간에서 녹유사리병, 청동합 2개 등의 사리기舍利器와 석탑의 건립 과정을 기록한 문서인 형지기形止記가 발견되었다.
형지기에는 탑의 이름과 함께, 경산부에 속했던 약목군의 향리와 백성들이 발원하여 탑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은 건립 목적과 제작 시기가 명확하며, 고려 초기 석탑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곳에 전시된 화강암 돌기둥은 1996년 경상북도 영주 소수서원(사적) 인근에서 주춧돌과 함께 발견되었다. 돌기둥은 자연석을 그대로 살려서 윗면과 아랫면만 다듬되 아랫면으로 갈수록 폭이 넓어지는 형태이다.
이 석조물의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형태의 돌기둥이 누각이나 대문에 사용된다는 점에서 큰 건축물의 부재로 추정할 수 있다. 돌기둥을 사용한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경복궁 경회루(국보), 부산 범어사 조계문(보물) 등이 있다.
소수서원이 숙수사宿水寺의 옛터에 세워졌다는 점 역시 참고할 수 있다. 숙수사는 언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지만, 고려 후기의 성리학자 안향1243-1306이 공부했다고 전할 만큼 중요한 사찰이었다. 또한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와 같은 불교문화재가 다수 남아 있어 절의 규모 역시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돌기둥은 숙수사에도 범어사 조계문과 같은 큰 건물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이 석탑의 재료는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 절터 인근에서 발견되었으며, 1996년 이 자리로 옮겨 왔다.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재는 탑의 몸체에 해당하는 탑신부塔身部만 남아 있다.
몸돌은 정육면체에 가깝고,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처마와 수평이며, 지붕돌받침은 4단으로 된 계단 모양이다. 이처럼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조각한 구조와 수평을 이루는 지붕돌의 형태는 통일신라시대 8~9세기의 특징이다.
이 가마는 산의 경사면을 따라 설치된 반 지하식 굴가마(등요 登窯)이다. 전체 크기는 길이 560㎝, 너비 170㎝, 깊이 70㎝ 내외이며, 바닥경사는 13° 정도이다. 토기를 구울 때 불을 지피는 연소실燃燒室과 토기를 굽는 공간인 소성실燒成室은 벽체壁體와 천정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그러나 아궁이와 연기가 빠지는 연도煙道는 남아있지 않아 원래 형태를 알기는 어렵다. 가마 내부에서는 삼국시대 토기 조각과 토제품 등이 출토되어 시기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굴가마로 토기를 굽기 시작한 것은 기원 전후로 알려져 있다. 다만 실물 자료로 조사된 사례는 많지 않은데, 대표적인 예로는 충북 진천군 삼룡리三龍里 백제 토기가마(원삼국시대)와 경주 손곡동蓀谷洞 토기가마(삼국시대)가 있다. 옥산동 7호 토기가마는 가마의 구조가 양호한 편이다. 또한 사용 시기를 추정할 수 있어서 삼국시대 토기 제작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설화리고분군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설화리 556-5번지의 구릉에 위치한다. 영남문화재연구원이 2012년 3월 19일부터 9월 4일까지 발굴했으며, 청동기시대 돌널무덤石棺墓 1기와 삼국시대 덧널무덤木槨墓 1기, 돌덧널무덤石槨墓 15기, 독무덤甕棺墓 1기, 돌방무덤石室墓 16기가 조사되었다. 원형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어 이곳으로 이전한 1호 돌방무덤은 널방玄室‧널길羨道‧호석護石‧봉분封墳을 갖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이다. 널방은 깬돌로 벽을 쌓고 큰 판석으로 천장을 덮었다. 서쪽으로는 출입구인 널길을 두었다. 관이 놓이는 널방에서는 귀걸이金銅製耳飾‧쇠도끼鐵斧‧미늘쇠有刺利器‧쇠칼刀子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무덤을 덮은 봉토에서는 제사와 같은 의례와 관련 있어 보이는 뚜껑 있는 굽다리 접시有蓋高杯도 여러 개 확인되었다.
대구광역시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신천 주변에는 신석기시대 이후의 유적지가 곳곳에 남아있다. 상동유적은 신천이 대구분지로 흘러드는 지점의 동쪽 자연제방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청동기시대의 집터와 고인돌이 많이 남아있다. 이 집터는 대구한의대학교 한방지원센터 부지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움집터竪穴住居址인데, 강돌로 벽을 쌓은 독특한 형태를 보존하고자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집터의 크기는 420~440㎝로 평면이 거의 원형이다. 남아있는 벽체의 높이는 44~90㎝이다. 이와 같은 집터는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다롄시大連市 쑤앙투어즈유적雙砣子遺蹟과 양토우와유적羊頭窪遺蹟, 제주도 서귀포시 화순리유적에서 확인된다. 상동 청동기시대 집터는 한반도 주거문화뿐만 아니라 중국 동북지역과의 문화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칠곡군 복성리 고인돌은 경부고속철도 건설공사 구간 내에 포함되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20여기의 고인돌과 돌널무덤이 확인되었는데 그 중 9호, 12호 돌널무덤과 2호 무덤의 뚜껑돌을 이곳에 옮겨 놓았습니다. 이 돌널무덤 가운데 12호는 주변에 긴 네모골로 넓게 돌을 깔아 무덤의 범위를 표시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 무덤 속에는 대롱옥으로 만든 목걸이와 돌화살촉, 붉은간토기 등의 유물이 남아 있었습니다. 9호는 바닥에 자갈을 깐 뒤 죽은 사람을 묻었던 무덤으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고인돌은 선사시대 사회구조와 정치체계는 물론 당시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연구자료입니다.
이 무덤들은 청동기시대 고인돌 아래 땅속에 만든 돌널石棺입니다. 땅위에 있던 큰돌上石은 이미 없어지고 주검을 묻었던 돌널만 남아 있습니다. 2010년 11월에 대구도시철도 3호선 건설구간에서 발굴되어 이곳에 옮겨졌습니다. ‘1호 돌널’은 1938년에 이미 발굴된 대봉동 제1구 제1호 고인돌입니다. 도시철도 공사구간에 옛 발굴지점이 포함되었기에 다시 발굴하였는데, 가까이에서 2기의 돌널이 새로 확인되었습니다. 1938년에는 채소밭이었으나, 이후 주택지로 바뀌면서 돌널들이 약간 손상을 입었습니다. 이천동 고인돌은 신천 주변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강둑에 위치하는데, 청동기시대 생활모습과 대구의 선사시대 지형을 가늠해 볼 수 있게 하기에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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