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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구박물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곳 국립대구박물관

우리나라

국립대구박물관의 복식문화실을 안내합니다.

섬유복식 산업을 바탕으로 근대도시로 성장한 대구의 지역 특성을 살려 우리네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옷의 역사를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과 자료를 통해 설명하고자 마련한 전시실입니다. 실, 옷감짜기, 색채, 옷이라는 4개의 키워드를 통해 실이 만들어져서 직물이 짜여 지고 옷이 되는 과정과 우리 전통 색과 다양한 디자인을 통해 우리 옷의 아름다움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근대도시로 성장한 대구

복식문화실(우리나라) 이미지 01
복식문화실(우리나라) 이미지 02
복식문화실(우리나라) 이미지 03
복식문화실(우리나라) 이미지 04
복식문화실(우리나라) 이미지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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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내용

언제부터 실을 만들고, 실을 엮어 옷감을 만들기 시작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초기의 옷은 동물의 가죽이나 식물의 껍질을 두르는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여러 도구 가운데 가락바퀴는 회전력을 이용하여 실을 만드는 도구인데 가락바퀴의 발명으로 견고한 실을 만들 수 있게 되어 옷감의 제직이 가능해졌습니다. 실잣기의 경험은 곧 직기의 제작으로 이어졌습니다. 한반도에서 직기의 최초 모습은 5세기 고구려의 마선구 1호 무덤에 벽화로 남아있으며, 광주 신창동유적에서는 기원전 2세기의 바디 및 실감개와 같은 부속이 발굴되었습니다.

대표 전시품

뼈로 만든 바늘

뼈로 만든 바늘

가락바퀴

가락바퀴

실타래

실타래

구멍이 있는 도구

구멍이 있는 도구

추

전시내용

조선시대의 남자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아치가 되면 품계와 의례의 종류에 따라 정해진 관복을 입었습니다. 관복의 종류에는 조복(朝服), 제복(祭服), 상복(常服)이 있습니다. 조복은 왕실의 경축일이나 조칙을 발표할 때 혹은 중요한 자리에 관리들이 입고 참가하는 옷입니다. 제복은 종묘사직에 제사할 때 착용하는 옷으로 조복과 구성이 같으나 옷의 색상과 장신구가 다릅니다. 상복은 평상시 집무할 때 착용하는 옷입니다.

대표 전시품

조복

조복

후수

후수

양관

양관

전시내용

왕실복식은 신분에 따른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면서도 아름다움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간혹 중국으로부터 관복을 사여 받기도 했지만, 왕실의 옷은 우리의 문화와 특색을 반영하면서 왕실문화의 일부분으로 오랫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왕실에서 사용하는 일상품과 복식은 상의원(尙衣院)에서 담당하였는데, 상의원은 바느질을 담당하는 침방(針房), 자수를 담당하는 수방(繡房), 실꼬는 일을 하는 고얏방 등으로 분업화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왕실의 복식은 당대 최고의 재료와 기술이 집약된 예술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표 전시품

흥선대원군 기린무늬 흉배

흥선대원군 기린무늬 흉배

적의본

적의본

오조룡보

오조룡보

곤룡포

곤룡포

전시내용

혼례는 관혼상제(冠婚喪祭 : 일상에서 거쳐야하는 중요한 의식) 중 가장 경사스러운 의례로 여겨졌습니다.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혼례 때는 일반 서민들도 궁중예복을 착용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습니다. 형편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신랑은 관리의 복식인 청색 단령(團領)을 입었고, 신부는 붉은 색의 원삼이나 활옷을 착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신부의 홍색차림과 신랑의 청색차림은 음과 양의 조화, 즉 남성과 여성의 조화를 뜻합니다.

대표 전시품

활옷

활옷

진주선

진주선

고이댕기

고이댕기

전시내용

전통사회에서 남성들의 옷차림은 단순한 치장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과 연결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남성들은 외출 시에는 물론 집안에서도 예의를 갖추기 위해 다양한 겉옷을 입었으며 각 옷차림에 맞는 모자류도 발달했습니다. 또 머리를 다듬기 위한 다양한 머리수식도 함께 갖추었습니다. 일상복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철릭, 직령, 도포, 창의, 두루마기 등이 있고 소매가 없는 옷으로 답호와 전복이 있습니다.

대표 전시품

철릭

철릭

동곳

동곳

망건과 대모풍잠

망건과 대모풍잠

전시내용

조선시대에는 죽은 사람 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옷가지로 관(棺) 속의 빈틈을 채우는 수례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무덤 속에 넣은 옷의 재질과 수량은 집안의 경제력 및 신분에 따라 격차가 있었고, 옷의 조합은 남녀에 따라 달랐습니다. 출토복식은 대부분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무덤을 이장할 때 수습됩니다. 특히 조선시대 전기의 사대부계층은 예법에 따라 회곽(灰槨)에 매장하는 장례방식을 선호하였는데, 이 회곽은 콘크리트와 같은 성질을 지닌 석회로 관을 밀봉시킨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시신은 미라 상태가 되고 옷가지들도 고스란히 남겨질 수 있었습니다.

대표 전시품

무명 솜장옷

무명 솜장옷

현풍곽씨 편지

현풍곽씨 편지

운혜

운혜

전시내용

돌잔치와 돌잡이 풍속에 관한 연원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왕가의 기록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나타나며, 반가(班家)에서의 풍습은 『양아록(養兒錄)』, 『쇄미록』 등 16~17세기의 기록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첫돌에 아이는 흰색의 배냇저고리를 벗고 오방색과 화려한 무늬를 수놓은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남자아이는 저고리에 밑이 트인 풍차바지를 입었고, 여자아이는 치마를 입었습니다. 또한 다섯 색의 천으로 만든 오방장 두루마기[까치두루마기]를 걸치고 쓰개를 썼습니다. 남자아이의 쓰개는 호건(虎巾)이나 복건(福巾)이고, 여자아이의 쓰개는 조바위라고 합니다.

대표 전시품

까치두루마기

까치두루마기

굴레

굴레

돌띠

돌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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