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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구박물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곳 국립대구박물관

우리나라

국립대구박물관의 복식문화실을 안내합니다.

섬유복식 산업을 바탕으로 근대도시로 성장한 대구의 지역 특성을 살려 우리네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옷의 역사를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과 자료를 통해 설명하고자 마련한 전시실입니다. 실, 옷감짜기, 색채, 옷이라는 4개의 키워드를 통해 실이 만들어져서 직물이 짜여 지고 옷이 되는 과정과 우리 전통 색과 다양한 디자인을 통해 우리 옷의 아름다움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근대도시로 성장한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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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내용

언제부터 실을 만들고, 실을 엮어 옷감을 만들기 시작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초기의 옷은 동물의 가죽이나 식물의 껍질을 두르는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여러 도구 가운데 가락바퀴는 회전력을 이용하여 실을 만드는 도구인데 가락바퀴의 발명으로 견고한 실을 만들 수 있게 되어 옷감의 제직이 가능해졌습니다. 실잣기의 경험은 곧 직기의 제작으로 이어졌습니다. 한반도에서 직기의 최초 모습은 5세기 고구려의 마선구 1호 무덤에 벽화로 남아있으며, 광주 신창동유적에서는 기원전 2세기의 바디 및 실감개와 같은 부속이 발굴되었습니다.

대표 전시품

뼈로 만든 바늘

뼈로 만든 바늘

가락바퀴

가락바퀴

가락바퀴는 실을 뽑을 때 사용하는 방직구의 일종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선사시대의 가락바퀴는 원반모양, 팽이모양, 주판알모양, 공모양 등이 있다. 가락바퀴의 가운데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에 가락바퀴의 축이 될 막대를 꽂아 그 축을 돌리는 방법으로 실을 뽑는 데 사용한다. 재질로 보면 흙을 빚어서 만든 것, 돌로 만든 것, 또는 나무로 만든 것 등이 있다. 선사시대에는 주로 흙을 빚어서 만든 것이 많다.

실타래

실타래

구멍이 있는 도구

구멍이 있는 도구

해남 군곡리 패총에서 출토된 골각기 중에는 4.3cm 길이의 구멍이 있는 도구가 발견되었다. 구멍의 크기는 0.2cm이다. 용도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나 간단한 천을 짜는 도구일 가능성이 있다. 각 구멍에 실을 넣으면 가장 간단한 경사개구經絲開口의 형태를 보여준다.

추

신석기시대의 추는 대부분 그물추라고 알려져 있으나 일부가 베짜기에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추는 이미 평직물을 만들 수 있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전시내용

조선시대의 남자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아치가 되면 품계와 의례의 종류에 따라 정해진 관복을 입었습니다. 관복의 종류에는 조복(朝服), 제복(祭服), 상복(常服)이 있습니다. 조복은 왕실의 경축일이나 조칙을 발표할 때 혹은 중요한 자리에 관리들이 입고 참가하는 옷입니다. 제복은 종묘사직에 제사할 때 착용하는 옷으로 조복과 구성이 같으나 옷의 색상과 장신구가 다릅니다. 상복은 평상시 집무할 때 착용하는 옷입니다.

대표 전시품

조복

조복

조선시대 관리들이 제사나 경축일, 정월초하루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에 서 특별히 예복을 갖추어야할 때 착용했던 옷이다. 금관金冠과 함께 착용 하기 때문에 금관조복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안에 청색의 청초의靑綃衣를 착용하고, 겉에 붉은색의 적초의赤綃衣를 입는다. 그 위에 폐슬蔽膝, 대대 大帶, 패옥佩玉, 후수後綬 등을 함께 착용한다. 품계에 따라 후수의 무늬, 패옥의 색 등에서 엄격한 차별을 두었다.

후수

후수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조복朝服과 제복祭服 뒤에 늘이는 장식이다. 품계를 나타내 는 대표적인 표시 중 하나로 품계에 따라 무늬, 색실의 수, 환環의 재료가 다르 다. 뒤에 늘어뜨린다고 하여 후수後綬라 부르며, 대대大帶에 고정하여 허리에 둘렀 다. 후수는 붉은색 비단 바탕에 청, 황, 백색의 순서로 학을 수놓고 2개의 금환金環을 달았다. 1·2품에 해당하는 관리가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양관

양관

조복과 함께 착용하는 것이다. 관의 앞면 중앙부분에 양梁이라고 하는 세 로선이 있어 양관梁冠 혹은 금관金冠이라고도 한다. 관의 머리둘레와 뒷부분은 당 초무늬가 새겨져 있고 금니金泥를 칠하였다. 품계에 따라 양의 수가 달라지며, 이 양관은 5량관으로 1품에 해당된다.

전시내용

왕실복식은 신분에 따른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면서도 아름다움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간혹 중국으로부터 관복을 사여 받기도 했지만, 왕실의 옷은 우리의 문화와 특색을 반영하면서 왕실문화의 일부분으로 오랫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왕실에서 사용하는 일상품과 복식은 상의원(尙衣院)에서 담당하였는데, 상의원은 바느질을 담당하는 침방(針房), 자수를 담당하는 수방(繡房), 실꼬는 일을 하는 고얏방 등으로 분업화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왕실의 복식은 당대 최고의 재료와 기술이 집약된 예술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표 전시품

흥선대원군 기린무늬 흉배

흥선대원군 기린무늬 흉배

흥선대원군이 착용한 것으로 전해지는 기린흉배이다. 구름무늬 비단 바 탕에 금사로 수를 놓았다. 봉황, 거북, 용과 함께 영험한 동물을 상징하는 기린은 인仁을 종중하고 의義를 지키는 지혜로운 동물로 인덕의 세상에 출현한다고 알려져 있다. 흉배는 조선시대 왕과 신하들의 상복尙服에 부 착하는 것으로 품계에 따라 무늬를 다르게 하였다. 계급을 구분해 주기도 하지만, 자수의 섬세함과 다양한 무늬는 옷을 돋보여주는 장식품의 역할 도 하였다. 조선시대 초에는 허리띠로 품계의 차이를 가렸으나 잘 구별되 지 않는다고 하여 1454년(단종 2)에 흉배의 무늬에 따라 상하를 구분하도 록 하였다.

적의본

적의본

적의는 중궁과 왕세자비가 대례복으로 착용한 포이다. 적의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고려시대 공민왕 19년(1370)에 명나라 태조 고황제가 관복을 사여한 데서 비롯된다. 이 적의본은 적의를 만들기 위한 옷본에 해당하는 것으로 한지를 여러 겹 붙여서 만들었다. 실제 크기와 같으며, 무늬를 그려서 그 위치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무늬의 배열은 12등분하여 그 사이에 꿩과 작은 꽃무늬를 넣었는데, 이러한 배열은 대한제국 이후 황후용 적의이다. 『증보문헌비고』 장복조에 따르면 황후의 적의는 짙은 청색 직물을 사용한다. 무늬는 12등분하여 꿩무늬와 그 사이에 작은 꽃을 직금한다고 기록되어있다.

오조룡보

오조룡보

보는 왕, 왕세자, 왕세손의 곤룡포와 왕비, 왕세자빈의 적의, 원삼, 당의에 부착한다. 용 발톱의 개수로 신분을 구별했다.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 五禮儀補序例』에 따르면 왕은 금오조원룡보金五爪圓龍補(금실로 수놓은 다섯 개 발톱의 용), 왕세자는 금사조원룡보金四爪圓龍補, 왕세손은 금삼조방룡보 金三爪方龍補를 가슴과 등 양어깨에 부착한다는 기록이 있다.

곤룡포

곤룡포

왕과 왕세손의 평상시 집무복으로 가슴·등·양 어깨에 용보가 달려 있다. 일 반적으로 옥대, 익선관, 흑색녹피화와 함께 착용하였다.

전시내용

혼례는 관혼상제(冠婚喪祭 : 일상에서 거쳐야하는 중요한 의식) 중 가장 경사스러운 의례로 여겨졌습니다.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혼례 때는 일반 서민들도 궁중예복을 착용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습니다. 형편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신랑은 관리의 복식인 청색 단령(團領)을 입었고, 신부는 붉은 색의 원삼이나 활옷을 착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신부의 홍색차림과 신랑의 청색차림은 음과 양의 조화, 즉 남성과 여성의 조화를 뜻합니다.

대표 전시품

활옷

활옷

공주나 옹주 또는 사대부가에서 주로 혼례 때 입던 예복禮服이다. 홍색비 단에 다양한 색사色絲로 화려한 길상吉祥무늬를 수놓은 것이 특징이다. 안감은 청 색을 대서 만드는데, 이는 음과 양의 조화이며 ‘청·홍색’으로 대표되는 전통 혼 례의 색을 반영한다. 소매의 끝에는 백색 한삼을 달며, 소매에 달린 색동은 황 색·홍색·청색으로 화려함을 더해준다. 이 활옷은 궁중활옷의 자수 형태로 뒷면 전체에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다. 물결 위에는 연꽃무늬를 4단으로 수놓았으며 좌우에는 백로白鷺 1쌍이 있다. 연 꽃 위로는 부귀를 희망하는 모란으로 장식하였다. 양 어깨에는 백복지원百福之源과 이성지합二姓之合의 문자무늬[文字紋]를 수놓아 복福과 장수를 기원하였다.

진주선

진주선

진주선은 혼례식에서 신부가 초례청醮禮廳에 나올 때 얼굴을 가리는 도구이다. 궁중에서 비빈妃嬪이나 공주가 혼례를 올릴 때 사용하였다.

고이댕기

고이댕기

주로 서북지방에서 혼례 때 착용하는 댕기이다. 일반적인 댕기와 달리 큰비녀를 꽂은 후 오른편에 두 가닥을 한두 번 감아 앞으로 늘어뜨려 착용한다. 무늬 없는 검정 비단에 모란꽃 세송이를, 댕기의 끝 부분은 둥글게 말아 능형菱形무늬를 수 놓았다. 댕기의 뒷부분은 커다란 진주꾸러미 장식 2개를 장식하였다.

전시내용

전통사회에서 남성들의 옷차림은 단순한 치장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과 연결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남성들은 외출 시에는 물론 집안에서도 예의를 갖추기 위해 다양한 겉옷을 입었으며 각 옷차림에 맞는 모자류도 발달했습니다. 또 머리를 다듬기 위한 다양한 머리수식도 함께 갖추었습니다. 일상복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철릭, 직령, 도포, 창의, 두루마기 등이 있고 소매가 없는 옷으로 답호와 전복이 있습니다.

대표 전시품

철릭

철릭

철릭은 고려 말 원나라를 통해 전래된 옷으로 상의와 하의를 따로 재단하여 허리부분에서 주름을 잡아 연결시킨 포이다. 원래는 관리들이 국난시에 또는 왕의 행행을 호위할 때 착용하는 융복이었으나, 점차 일상적으로 착용하는 남자들의 대표적인 겉옷이 되었다. 철릭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상의와 하의의 비율, 주름 처리방법, 소내의 모양에 변화가 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상의와 하의의 비율이 1:1로 거의 같으나 후기로 갈수록 하의 부분이 길어진다. 또 소매폭이 점차 넓어지며 초기에 촘촘했던 허리의 주름은 임진왜란 이후 간격이 넒어지거나 맞주름이 등장하였다.

동곳

동곳

동곳은 상투가 풀어지지 않도록 고정시키기 위해 정수리에 꽂는 기혼 남성의 장신구이다. 조선 시대의 동곳은 다리가 하나이나, 고려시대의 동곳은 윗부분은 반구형이고 아랫부분에는 다리가 두 개 달려있다.

망건과 대모풍잠

망건과 대모풍잠

망건은 상투를 튼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게 이마에서 뒤통수에 걸쳐 두르는 것이다. 말총을 엮어 만들며, 당을 관자에 걸어 머리에 동여맨다. 풍잠은 망건의 이마 부분 위쪽에 다는 반달 모양의 장식품으로 갓이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상류층에서는 옥, 밀화, 대모 등을 사용하였고, 서민은 우각, 목칠, 나무 등을 사용하였다. 위의 풍잠은 대모로 만든 것으로, 네 개의 구멍에 실을 꿰어 망건에 부착하였다.

전시내용

조선시대에는 죽은 사람 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옷가지로 관(棺) 속의 빈틈을 채우는 수례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무덤 속에 넣은 옷의 재질과 수량은 집안의 경제력 및 신분에 따라 격차가 있었고, 옷의 조합은 남녀에 따라 달랐습니다. 출토복식은 대부분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무덤을 이장할 때 수습됩니다. 특히 조선시대 전기의 사대부계층은 예법에 따라 회곽(灰槨)에 매장하는 장례방식을 선호하였는데, 이 회곽은 콘크리트와 같은 성질을 지닌 석회로 관을 밀봉시킨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시신은 미라 상태가 되고 옷가지들도 고스란히 남겨질 수 있었습니다.

대표 전시품

무명 솜장옷

무명 솜장옷

현풍곽씨 편지

현풍곽씨 편지

곽주가 장모에게 보낸 편지이다. 외가에 간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쳐달 라고 부탁하고 있다. 17세기 초에 양반 여성들은 한글을 잘 알고 있었으 며,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한글을 익혔음을 알 수 있다.

운혜

운혜

전시내용

돌잔치와 돌잡이 풍속에 관한 연원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왕가의 기록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나타나며, 반가(班家)에서의 풍습은 『양아록(養兒錄)』, 『쇄미록』 등 16~17세기의 기록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첫돌에 아이는 흰색의 배냇저고리를 벗고 오방색과 화려한 무늬를 수놓은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남자아이는 저고리에 밑이 트인 풍차바지를 입었고, 여자아이는 치마를 입었습니다. 또한 다섯 색의 천으로 만든 오방장 두루마기[까치두루마기]를 걸치고 쓰개를 썼습니다. 남자아이의 쓰개는 호건(虎巾)이나 복건(福巾)이고, 여자아이의 쓰개는 조바위라고 합니다.

대표 전시품

까치두루마기

까치두루마기

첫돌이나 명절 때 어린이들이 입는 옷이다. 오방장두루마기라고도 한다. 기본적인 형태는 보통 두루마기와 같으나, 길·섶·소매 등에서 색을 다르게 한 것이 특징이다. 앞섶에는 여러가지의 색을 조화롭게 배치하고 앞면과 뒷면에는 아기의 복福과 장수를 바라는 다양한 길상吉祥무늬가 수놓아져 있다.

굴레

굴레

굴레는 돌쟁이부터 4~5살 까지의 남녀 어린아이들이 방한을 겸해 쓰던 장식적인 쓰개이다. 돌을 맞이하는 아이들이 주로 착용하기 때문에 돌모자 라고도 한다. 지방에 따라 형태가 약간씩 다르다. 개성의 굴레는 아홉가닥으로 구성되며, 서울의 굴레는 세가닥으로 방한보다는 멋과 장식을 위해 사용되었다. 이 굴레는 개성지방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머리를 완전히 덮어 얼굴만 내놓게 하는 형태이다. 남색 단緞 바탕에 붉은색 단을 두르고 길상吉祥무늬를 수놓아 장식하였다.

돌띠

돌띠

돌을 맞은 아이의 허리에 수명장수壽命長壽를 기원하는 뜻으로 돌려 매주는 허리띠이다. 남자아이는 남색, 여자아이는 홍색의 돌띠를 한다. 아기의 복福과 장수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십장생十長生무늬를 수놓아 장식한다. 오곡五穀이 담긴 주머니를 돌띠에 매달아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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