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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경북 지역의 불교문화와 유교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실입니다. 불교문화는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양식을 대표하고 조형미가 우수한 불교조각품과 불교공예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유교문화는 대구, 경북지역의 사원을 중심으로 사원에서 서원으로 옮겨가는 시대적 전환과 영남학파의 활동을 관련 자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유교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궁극의 목표인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강조한 ‘수신’, ‘제가’, ‘치국’을 전시개념에 도입하여 조선시대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문화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숙수사(宿水寺) 터에 세워졌습니다. 절터에 서원을 조영하였다는 사실은 사원에서 서원으로 옮겨가는 시대적 전환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조선 중종 대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1495-1554년)은 순흥 출신의 고려시대 유학자인 안향(安珦)(1243-1306년)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워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하였습니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1501-1570년)의 요청에 의해 명종 5년(1550)에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의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을 받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습니다.
숙수사는 신라 때 창건된 사찰로 전해 지며, 소수서원이 들어서가 이전에 이미 폐사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불상은 모두 25구로 제작 시기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 며, 종류도 부처·보살·반가사유상·탄생불·신장상·공양자상 등 다양하다.
안향(1243~1306)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원 나라에서 주자의 저술을 도입하여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보급하였다. 1318년 왕명으로 안향의 초상화를 그려 문묘에 봉안할 때, 흥주수 최 림이 한 본을 더 모사하게 하여 흥주향교에 모셨다고 한다. 이 초상 화는 조선 후기의 이모본으로 여겨진다.
1549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의 건의로 사액 받은 뒤 1550년 명종이 직접 글씨를 써서 하사한 소수서원 현판 이다. 현판 오른쪽에는 명종의 어필임을 기록한 글씨와 왼쪽에는 ‘1550년 4월 어느 날에 임금이 직접 써서 이름을 지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 서원인 백운동서원의 창건과 배향 인물에 관한 기록을 엮은 것으로, 1544년(중종 39)에 주세붕이 편찬하였다. 권1은 「안씨행록」, 「고적기」, 권2는 「백운동서원기」, 「학전기」, 권3은 「백록동부」 및 차운 등을 수록하였다.
도동서원(道東書院)(사적 제488호)은 한훤당 김굉필을 1568년 유림(儒林)에서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사우(祠宇)를 지어 향사(享祀)를 지내오다가 1573년 쌍계서원(雙溪書院)으로 사액되었으나, 1597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습니다. 1605년에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다시 짓고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이라 하였다가 1607년 도동서원으로 사액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주요서원 중의 하나입니다.
대구 달성군 도동서원에 있는 비석 탑본이다. 비석은 김굉필(1454~1504)을 추모하기 위해 김대진이 여러 사림들의 협력으로 1626년에 세웠다. 한훤당의 생애와 관직, 후손, 일화 등을 소개하고 있다.
16세기 사림들은 자기를 수양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실 천적 가치규범으로서 성리학을 가까이 하였다. 『소학』의 규범과 윤 리를 몸에 익혀 실천함으로써 학문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소학언 해』는 『소학』을 읽기 쉽게 번역하여 토를 달아 간행한 책이다.
1719년(숙종 45) 김하석이 김굉필의 전기를 중심으로 유 학자들의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도동서원에서 간행하였다.
영남지역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선비들의 활동이 활발했습니다. 16세기의 사화기(士禍期)에 훈구(勳舊), 척신(戚臣) 세력에 대립한 재야사류(在野士流)로서 사림파(士林派)는 김종직을 중심으로 하여 정여창, 김굉필, 이언적, 이황, 조식 등 영남 출신의 선비들이 그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조선시대 사림의 활동은 서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서원은 선현(先賢)에 대한 봉사奉祀와 유생儒生의 교육이라는 두 기능을 담당한 사설 교육기관으로뿐만 아니라, 향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의견교환이나 해결책을 논의하는 향촌운영기구로서의 역할도 담당하였습니다.
영남학파의 종조인 김종직(1431~1492)의 문집이 다. 이 초간본은 남곤(1471~1527)의 서문과 ‘조의제문’을 권수에 수록하고 있다. 초간본은 임진왜란 때 거의 유실되어 전하지 않다 가 1649년에 경상도관찰사 이만(1605~1664)이 간행하였으며, 이후 1789년에 이헌경(1719~1791)이 서를 붙여 간행하였다. 이는 모두 초간본을 교정, 보판한 후의 인쇄본이다.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학자인 회재 이언적 (1491~1553)의 시문집이다. 서자 전인이 이황(1501~1570)에게 자 문을 구하여 회재의 글을 정리하고 이황이 쓴 행장을 붙여 정고본 을 완성하였다. 이후 수많은 중간보들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은 그 중 하나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내암 정인홍 (1535~1623)의 시문집이다. 정인홍은 광해군 때 인조반정으로 처 형되어 그의 학문이나 정치적 비중에도 불구하고 저평가되어 1911 년이 되어서야 후손들에 의해 15권 7책으로 구성된 문집이 간행되 었다.
유학을 공부하여 그 이념과 도덕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나아가 사회를 교화하는 것을 임무로 여기는 지식인을 선비라 합니다. 자기 절제를 통해 도덕적 인격을 완성하고자한 선비는 선현들의 가르침이 담긴 유교경전을 익히고 이론을 심화하는 한편, 마음 수양에 부단히 힘썼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연과 인간사에 대한 여유로운 눈길과 멋스러운 정서를 시(詩), 서(書), 화(畵)로 형상화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들 예술작품에는 선비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과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사서삼경은 유교의 기본 경전으로, 사서는 대학·중용·논 어·맹자, 삼경은 시경·서경·역경을 일컫는다. 중국 명나라의 영락제 에 의해 사서대전이 편찬되었고, 이것이 조선에 전래되어 널리 간 행, 보급되었다. 사서는 모든 사람의 기본 자질을 기르는 정치·도 덕·사회·문화의 준칙을 설파한 내용이며, 삼경은 성인의 변하지 않 는 가르침으로 모든 진리의 원천이 된다.
중국 송나라 때 주희와 여조겸이 편찬한 성리학 해설서이 다. ‘근사’는 논어의 내용 중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절실 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인은 그 가운데 있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송의 진덕수가 여러 경전에서 심성 수양에 관한 격언들 을 모아 편찬한 『심경』에 제가의 학설과 부록을 붙인 책이다. 1603년(선조 36) 정구가 『심경』을 더욱 상세히 알기 위해 편찬하 였다.
주자의 문집인 『주자대전』의 시편 중 ‘절계원황운관’ 을 옮겨 적은 이황의 글씨이다. 이황이 중년시절에 쓴 글씨로 추정 되는 이 행서오언시는 글자 모양새가 정방형 혹은 다소 납작한 듯 한 인상을 주는데, 이는 그의 글씨 각체에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이 다.
윤집, 홍익한과 함께 삼학사로 불리는 오 달제(1609~1637)의 매화 그림이다. 그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극력 반대하였는데, 후에 청에 끌려가서 모진 협박화 유혹 에 굴하지 않아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상단에 그의 현손인 오언유 가 쓴 숙종과 영조의 어제시가 있다.
유교에서 가정은 모든 윤리 규범의 출발점으로 여겨졌습니다. 유교 윤리의 핵심 가치인 ‘인(仁)’과 ‘의(義)’가 각각 어버이와 형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며, 사회와 국가를 지탱하는 규범도 가족 윤리에서 출발하며, 가정의 운영은 국가를 바르게 다스리고 이어나가기 위한 선행 과제로 중요시 되었습니다. 고려 말에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주자의 『가례(家禮)』가 전래되어 우리 고유의 풍속과 절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주자의 『가례(家禮)』를 기준삼아 이를 해설하고 보충하여 사회 전반에 보급, 정착시키고자 하여, 가례는 사대부 집안은 물론 국가에서도 가장 중요한 생활 준칙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조선 영조 때 왕명을 받들어 김귀주(1740~1786) 등 이 편찬한 문묘향사에 관한 기록이다. 문묘와 계성사·숭절사의 위 패 배치를 도시하고 그 뒤에 각각의 향사인의 간단한 약력을 소개 하고 있다.
주자가 유가의 예법의장에 관하여 상세히 기술한 『주자가례』를 기초로 하여 의절고증·잡록을 추가하여 편찬한 책이 다.
조선 후기 유학자 안진석(1644~1725)이 각종 문헌에 나오는 관혼상제의 사례를 상세히 고증하여 편찬한 책이다. 급한 *치국 일을 당했을 때 이를 참고하여 예법에 벗어나지 않고자 하는 의도 에서 만들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신의경(1557~1648)이 『가례』의 원문 을 위주로 하고 고금의 제가예설을 참고하여 만든 상례서이다. 내 용은 초상에서 장제까지의 모든 의식을 요령있게 정리하였다.
조선시대 회혼례 장면을 그린 화첩이다. 회혼례는 결혼 한 지 60년이 되는 해에 부부가 다시 혼례를 치르는 행사이다. 태 어난 지 60년이 되는 회갑, 과거에 등재한 지 6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는 회방과 함께 장수와 복을 상징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감실은 사당에서 조상의 신주를 모셔두는 장으로 신주장이 라고도 한다. 조상의 넋을 모시는 곳이므로 생전에 살던 공간과 마 찬가지 의미로서 집 모양이 많다.
교의는 제례·상례에서 신위를 받들어 모시는 의자이다. 형 태는 신주가 위치하는 등받이가 있는 신주칸이 있고, 긴 다리 중간 에 하나의 층널을 두었다. 신주칸 층널의 등받이에는 대개 약간의 장식을 하는데, 이 교의에는 ‘卍’자가 투각으로 새겨져 있다.
유교에서는 개인이 도덕적인 삶을 살 때 비로소 사회혼란이 극복되고 좋은 세상이 된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도덕성은 일반 백성들보다 직접 다스림을 맡은 군주와 사대부에게 더욱 요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의 여러 왕들은 유교의 교육과 학습을 바탕으로 관료들과 건전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사회 전반을 올바르게 이끌어나가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하고 추진하였습니다. 왕과 함께 유교 정치의 중심을 이루는 관료(大夫)는 유학자로서 자신의 도덕적 인격을 완성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것을 삶의 최고 목표로 삼고,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어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그러한 목표를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유교의 기본 윤리 덕목을 보급하기 위하여 제작한 책 이다.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한 것이다.
1894년(고종 31)에 치렀던 갑오년 사마시의 급제자 명단을 기록한 책이다.
1814년(순조 14) 3월 16일 과거에 문과 장원으로 합격한 조기영(1781~1867)의 홍패이다. 홍패는 문·무과 과거의 마지막 시 험인 전시에 급제한 사람이 받는 일종의 합격 증서이다. 붉은색 종 이에 급제자의 성적·등급·성명 등을 먹으로 썼다.
암행어사를 비롯한 관리들이 지방 출장 때에 역에서 말을 징발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신표이다. 마패에 새긴 말의 수는 징발 할 수 있는 말의 수를 나타내며, 품계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호패는 신분에 따라 기재 내용이 달랐다. 생원이나 진사의 경우는 황양목을 재료로 하여 이름, 출생 연도, 생원과 진사가 된 연도 등을 기재하였다.
서매수(1731~1818)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1787 년(정조 11)에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에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1805년(순조 5)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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